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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회암사지맷돌 (양주) - 양주혜암사지

by gotripmap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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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맷돌 (양주)

양주 히로지사지 동두천에 사는 언니의 집을 방문하면서 10여년 전부터 가본 양주회암 사지를 방문했다. 이전에는 교통편이 다소 불편했지만 최근 양주시에 옥정신도시가 인근에 만들어져 교통편도 매우 편리해져, 회암 사지와 박물관 사이에 넓은 공원도 있어 주말 가족 출입 장소로 적격하다고 생각된다.

 

양주 히로사지는 경기도 양주시 텐포산에 위치한 사원이며, 숭유억불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비들의 비호를 받고 조선의 왕사로 불린 조선 최대의 사원이지만, 조선중기에 폐사되어 지금은 이와 같이 회암사는 숭유억지정책과 관련된 좋은 예이며, 19세기에 이 절적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 2022년 유네스코 잠정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단지 고려명종 4년(1174)에 가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는 기록이 동국여자승람에 있기 때문에 회암사가 그 전부터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 인도 출신의 전 스님 손가락 공선사가 개경의 감로사에 도착해 에 돌아올 때까지 통도사와 화랑사 등 전국의 사원)과 같고 가람을 이루면 불법이 크게 흥분할 것이다. 연선사(懶翁禪師, )가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덧붙이고, 참고로 고려 말기의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영은 왕패왕사 참근으로 원국에 가서 지공 선사로부터 수학해 법을 계승했다. 나온이 회암사의 전당 확장 공사를 마쳤을 때에는 262관의 전각이 있었고, 에 낙성법회 개최 시에는 전국의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회암사가 크게 발전하면 유생들은 백성이 회암사에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장했고, 이에 국왕은 나연을 다른 사원으로 옮겨 주석시키고 경남 밀양시 영원사에 갔던 도중 경기도 여주시 신루지에서 숨을 내쉬었다. 리사 선시의 문인 목은 이색(李穡, )이 쓴 천보산 회암 사수 조기(천보산 히로지 수조기)에 회암사 중창의 기록이 있어, 그 당시 완성된 건물의 총수는 262개, 그런 구절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과도한 말이 아닐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고려 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원증국사의 보우(圓證國士普愚, )도 제자인 무학대사의 자초(무학대사 자초, 년)와 함께 회암사를 크게 중창했다.

 

또 회암사는 선대왕들의 제사장을 보내는 사원이므로 석왕사처럼 더욱 특별히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았지만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반해도 한 번 왕실의 전통에 정착하면 단지 왕실의 전통이라는 만큼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는 보우에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시켜 전국 제일의 사원에서 중흥을 꾀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더욱 강력해진 억불정책으로 회암사가 명종대에 유생에 의해 방화되었거나 임진왜란 중에 사라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나연이 회암사를 중창한 14세기 후반부터 문정왕후가 불사를 후원한 1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최대 사원의 지위와 권위는 일단락했다고 판단된다. 그 후,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와 부도를 세우고, 또 회암 사지로부터 700m 정도 떨어진 북쪽의 계곡에, 구회암사의 삼대화상(삼대화봉, 즉 지공, 나연, 무학)묘탑(묘탑)을 지키기 위한 작은 암사에.

 

발국 결과에 따르면, 회암 사지는 평지가 아닌 낮은 구릉이 있는 산간에 조영된에도 평지의 당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이 있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부채 모양의 부지를 8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했다. 또, 석축이나 건물의 배치 형식이 궁전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정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도 있어 석재를 정돈한 기법도 꽤 뛰어난 석공이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회암사는 전체 규모와 가람 조영 기법 등으로 보고 왕실에 소속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공사가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인근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지상을 흐르도록 돌을 쌓아 만든 수로가 절을 둘러싼다는 점이 드물지만, 이러한 구성은 고려시대의 궁전과 사원 건축지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회암사 복원도를 보면 건물의 배치가 경복궁과 같은 궁전과 비슷하지만 남문과 중문을 통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보광전(대웅전)과 그 뒤에 모이는 주요 건물의 배치 등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 게다가 보광전 주위에는 궁전이나 종묘 등에 있는 박석이 깔려 있어 궁정이나 왕실 관련 사원에서만 쓰였던 고가의 청기와 비롯해 궁전 건축물의 지붕 못생긴 바닥에 실려 있는 용두와 鄜城이 집에 나왔다. 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최고급 도자기나 금속 공예품 등이 다량으로 수습됐다. 한편 회암사의 부침과 함께 사용 또는 폐기된 기와는 사원의 연혁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사지보다도 다양하고 다양한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특히 맹조류를 중심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으나 제작 기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기와도 다수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범인 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지속적으로 제작 활용되었지만 회암 사지에서 출토한 벽자기와는 그 전환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범인 진언이 새겨진 기와의 사용은 당시 밀교가 서서히 유행하고 육자 진언을 비롯한 특정 진언에 대한 신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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